비가 그친 아침 보도블록 위에는 지렁이가 여기저기 기어 나와 있고 몇 마리는 말라 죽어 있다. 땅속에 사는 지렁이가 비만 오면 밖으로 나오는 것은, 흔히 말하듯 물에 빠져 숨이 막혀서라기보다 젖은 땅 위가 지렁이에게는 멀리 이동하고 짝을 찾을 수 있는 드문 기회이기 때문이라는 것이 지금의 설명이다. 비에 익사한다는 오래된 말은 절반만 맞다.
지렁이는 폐가 없고 피부로 숨을 쉰다. 피부가 축축해야 산소가 녹아 들어오므로 평소에는 마른 공기와 햇빛을 피해 땅속에서만 산다. 땅 위로 나오면 금방 말라 죽기 때문에 밤이나 비 오는 날이 아니면 나올 수 없는데, 비가 와서 땅 표면이 젖고 공기가 습해지면 몸이 마르지 않고 멀리까지 갈 수 있다. 땅속에서는 하루에 몇 센티미터 가기도 힘든 지렁이가 땅 위에서는 몇 미터를 움직인다.
물에 빠져 숨을 못 쉰다는 설명이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니다. 지렁이는 물속에서도 며칠을 살 수 있지만 흙에 물이 가득 차면 산소가 적어져 불편해지고, 오래 고인 물에서는 산소가 바닥나 밖으로 나오려 한다. 다만 비가 조금만 와도 나오는 것을 보면 숨이 막혀서만은 아니고, 땅 위로 나갈 수 있다는 신호로 비를 쓰는 것에 가깝다.
빗방울이 땅을 두드리는 진동도 한몫한다. 지렁이의 천적인 두더지가 땅속을 파고 올 때 내는 진동과 빗소리가 비슷해서, 지렁이가 두더지를 피하려고 위로 올라온다는 설명이다. 실제로 낚시꾼들이 땅에 막대를 꽂고 긁어 진동을 내면 지렁이가 올라오는 것을 미끼 잡는 데 쓰고, 갈매기나 새들도 발을 굴러 지렁이를 끌어낸다.
비 온 뒤 지렁이가 길에서 말라 죽는 것은 사람이 만든 길 때문이다. 흙이 있는 곳이면 비가 그치고 다시 파고들어 가면 되는데, 아스팔트나 보도블록 위에 올라온 지렁이는 돌아갈 흙을 찾지 못하고 해가 뜨면 말라 버린다. 지렁이는 흙을 먹고 배설하며 땅에 공기를 통하게 하는 동물이라, 길에서 보이면 화단으로 옮겨 주는 것이 좋다.
비가 오면 지렁이가 땅 위로 나오는 것은 몸이 마르지 않는 그때가 이동할 유일한 기회이기 때문이니, 길 위의 지렁이는 물을 피해 도망친 것이 아니라 비를 타고 길을 떠난 것이다.